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가 멸망/사례 (문단 편집)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width=400]]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기[*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보통 알려진 깃발은 상선기로 국기에 준하게 쓰였지만 공식적인 국기는 한 장에 묘사되어 있듯 두 국가가 각기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제국/헝가리 왕국의 별개의 국기였다.] || |||| '''원인''' || || 전쟁 ||''' [[러시아 제국]]을 자극한 외교적 실책([[사라예보 사건]])'''[br]'''감당불가의 초거대 규모 전쟁([[제1차 세계 대전]])'''[br]'''한계를 초과한 물량 ([[브루실로프 공세]], [[이손초 전투]])'''[br]'''소모전([[이손초 전투]])''' || || 내란 ||'''혁명'''|| || 내정 ||지도층 부패(레들 대령 사건)[br]'''실패로 돌아간 개혁[br]국가일체감의 상실[br]''''''다양한 민족과 종교의 관리 실패''''''[br][[프란츠 요제프 1세|군주]] 개인의 카리스마로만 유지되던 지도층'''|| || 공황 ||'''국가 경제의 파탄'''|| |||| '''결과''' || || 멸망 ||'''소요(봉기, 분리독립)''' || 오스트리아는 예로부터 프랑스와 더불어 유럽의 전통적인 강대국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전파된 계몽사상과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여러 민족들이 분리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제국 내 합스부르크 황가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이 와중에 [[1848년 혁명]]이 터지자 메테르니히가 망명을 가고 황제가 교체되는 혼란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틈타 제국 주요 지역인 헝가리가 합스부르크 황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케이스가 되고 말았는데, 오스트리아 자체적으로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해 [[러시아 제국|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며, 결국 러시아로부터 차관과 20만 군대를 지원받아 겨우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종이 호랑이 그 자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은 제국 역량 강화에 신경쓰기는 커녕 오로지 독일 연방에서의 주도권을 잡는것에만 몰두하였으나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의 패배로 독일 연방에서 퇴출되었고 황실의 영향력은 전반적으로 크게 감소되는 결과가 초래되어 합스부르크 황실은 더 큰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헝가리에서는 각종 소요가 빈발하여 황제까지 습격당할 뻔하자 더 이상 헝가리의 분리 독립 요구를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합스부르크 황실은 헝가리 귀족들에게 [[대타협]]을 제안했고 헝가리 귀족들이 이를 수용하였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독립 내각이 따로 존재하는 이중제국 체제인 동군연합을 수립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하게 된다. 이후 제국의 관료들은 선진적인 복지 정책들을 도입했고, 국민들의 생활 수준도 당대 유럽에서 높은 편이었다. 노숙자 같은 사람에게도 사회 보장의 혜택은 골고루 돌아갔으며 오스트리아의 검열은 형식적이었다. 그러나 헝가리에서는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민족 억압책을 폈기에, 오스트리아 같은 사상적 다양성이 없었다. 헝가리의 강압적인 정책으로 소수민족들은 민족 정체성 붕괴를 걱정해야 했으며 슬로바키아인은 헝가리에서 독립하기 위해 체코인과 연대하려 했다. 게다가 군의 문제점도 심각한 편이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꾸준히 확장을 거듭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내부에서도 점점 비게르만계 출신 병사들의 수가 늘어났다. 독일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민족 출신 부대의 수가 독일어를 구사하는 부대의 수를 넘어서자, 충성심 및 의사소통과 관련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제국군이 독일어를 공용어로 지정했음에도 언어가 달라서 제대로 된 의사 소통이 힘들었다.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군대 슬라브어'로 널리 알려진 방언을 사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신병들은 80개에 이르는 독일어로 된 군대 명령어 역시 함께 암기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일반적으로 대부분 [[독일인]]인 장교들과 슬라브인 출신 병사들은 아예 말을 서로 안했다. 이런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슬라브인 군인들을 징집할수 밖에 없는 것이, 앞서 서술했듯 당시 제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슬라브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을 제외했다가는 갈리치아를 방어할 군인들이 매우 부족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뽑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적국의 첩보 기관에 매수되는 군인들이 나오기도 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첩보 장교 알프레트 레들 대령의 사치스러움과 동성애 성향을 파악한 러시아 제국이 그를 포섭하여 이후 무려 10년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작전계획을 넘겨받는 등 [[부정부패]]와 군 기강해이가 심각했다. 1914년에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자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사력을 과시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력은 독일 제국의 도움 없이는 약소국인 세르비아 왕국조차 제대로 제압할 수 없을 지경이었을 정도로 막장이었고 결국 제대로 된 중화기도 거의 보유하지 못한 세르비아 군도 제압하지 못해서 세르비아 왕국 정도는 오스트리아가 혼자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독일 제국]]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그 막장이라 불리는 [[이탈리아군]]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으며 알프스 일대에서 소모전을 벌이다가 러시아 제국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의 [[브루실로프 공세]]로 아래에 서술된 [[러시아 제국]]과 함께 사이좋게 등골이 박살나며 [[독일 제국]]의 도움없인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 '''이미 그 정도 수준이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1918년 독일 제국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협상국의 승리, 동맹국의 패배로 끝나면서 독일 제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바뀌고 전쟁 배상금으로 국가 경제가 파탄나고, 오스만 제국은 혁명으로 멸망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카를 1세]]는 퇴위함으로써 길게는 645년, 짧게는 392년간 이어진 [[신성 로마 제국|합스]][[합스부르크 제국|부르크 가문]]의 중동부유럽 지배는 막이 내리고 공화정이 선포되어 현재의 영토만을 가진 오늘날 [[오스트리아]]가 탄생하게 되었다.[* 하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자리에 오른 시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하나는 [[합스부르크 제국]]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